★ 아래의 내용은  <백투더 클래식> 16장를 읽는 동안 일어났던 상황에 대한 나눔입니다.

 책의 요약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작은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16장 영성 생활은 리듬이다._베네딕트의 규칙서와 규칙의 재발견(이강학)

권혁일 엮음. <백투더 클래식>. 예수전도단

 

수퍼비전 수업에서 ‘공동문화’에 대한 부분을 읽었는데 그 부분과 16장이 통해서 또 놀랐다. 공동문화는 학습된 생활양식이라는 말에서 자기 전에 칫솔질 하는 습관을 부모가 가르치는 것을 생각했었는데 바로 그 예가 이 부분에서 나왔다.

 

한국교회에서 영성과 공동체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지만 영성과 공동체의 교차로에 ‘규칙’이 있다는 것은 간과 하고 불편해 한다. 특히나 한국 교회안에서 ‘규칙’이라는 단어에 오해와 거부감으로 교회 공동체가 영성으로 새로워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저자의 해석이 있다.

 

수도원의 엄격한 감독 아래 준수 되던 규칙은 율법주의 경향으로 나타났고 현대 개신교 근본주의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폐단을 경계하면서 영성 생활에서의 규칙의 자리를 회복하는 방법을 문제 제기한다.

 

어린아이의 양치질을 예로, 규칙이 훈련을 통해 내면화 하게 될 때의 유익을 설명한다. 규칙적인 양치질이 건강한 치아를 유지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면 영성생활에서 규칙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의 형성’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트 규칙서의 7장의 겸손을 예로 설명한다. 규칙서의 겸손을 그대로 따르려면, 그것을 따르고 적용할 수 있는 환경설정이 되지 않을 경우는 규칙의 강요는 폭력과 같다. 두 번째 예로 성무일도를 설명하는데 정주 수도회에서는 성무일도의 예배가 3시간마다 진행되었지만, 탁발 수도회로 넘어오면서 수정되었으며, 현대인에게도 적용가능한 성무일도가 필요하다. 베네딕트 규칙도 성무일도도 그 규칙 자체보다 그 의미를 알고 현대에 적용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솔루션으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하고 우리 몸과 마음에 반복되는 리듬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움직임들을 끼워 넣자고 제안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다면, 수도원에는 없었지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들을 활용하여 충분히 영성 고전의 방법들을 변형하여 우리 생활에 리듬으로 만들어 예수님 닮은 성품을 만들어 갈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때 밥은 3끼 먹으면서 왜 성경은 3번 안 읽을까 생각하고 하루에 3장씩 성경 읽기를 고3때부터 해온 것 같다. 하루에 못 읽으면 주말에 시간을 내어서 읽기도 했다. 3장을 읽으려고 공부하기 전에 항상 먼저 성경을 읽고, 버스에서도 읽고 했던 기억이 있다.

 

20대 초반 성경공부 시간에 목사님이 정시기도를 제시하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을 정해놓고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이 시간은 부르짖는 시간이 아니고 듣는 시간이다. 아주 오래 걸렸지만 이런 리듬덕분에 내가 나를 좀 더 알아가고 치유되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영성 생활은 리듬이다.

 

1장. 영성지도란 무엇인가?

  장로교 교회에서 자라난 나는 당연히 장신대를 가게 될줄 알았다. 극적으로 횃불에 2017년에 입학하게 되면서 이곳은 하나님이 보내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왜 횃불인가요? 왜 지금인가요?’라고 자주 묻고 있다. 여러 가지로 답을 많이 주셨다.

 

  책을 읽으면서도 굳이 내가 왜 횃불에 왔어야 했는가에 또 동의가 되었다. 2006년부터 2016년 2월까지 Y대에서 학생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그러면서 상담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혼자 맺었다. 상담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경험들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많이 변화시키셨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것들은 어디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라 ‘하나님 저 이단이에요?’ 계속 물었고, 책을 통해서라도 설교를 통해서라도 알려달라고 졸랐다. 어쩌면 횃불의 시간이 이때 질문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시간인 것 같다.

 

제네트 A. 바크. 거룩한 초대 영성지도. 최승기 역. 은성.

 

  ‘영성지도’의 의미와 목적 등을 읽으며, 어쩌면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성령님과 함께 하므로 신자와 불신자 상관없이 서로에게 영성지도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성지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지도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상담자가 결국 성령님이시기에 두 사람은 성령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대화는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므로 결국 지도자나 피지도자나 결국 성령님으로부터 얻게 되고 알게 되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1학년 때 멘토링 때문에 담임목사님께 월1회 멘토링 받던 것을 지금도 받고 있다. 혼자 사역하는 나에게 학교와 목사님의 멘토링은 바로미터가 되어준다. 정기적 멘토링이 1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얼마 전 목사님께서 나와의 만남을 통해 본인도 깨닿는 부분이 있어서 기대가 된다고 하셨다. 항상 목사님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죄송했는데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학생들과 만날 때도 학생들이 변하게 되는 부분 뿐 아니라 내가 알게(경험하게) 되는 것들도 있었다.

 

  어제밤 책을 이 읽고 있는데, 매주 만나던 A가 ‘다윗의 노래’를 보내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바로 그전 정시기도 시간에 월세 보다 십일조를 내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있는 돈을 털어서 십일조를 하겠다고 결정하면서 아버지가 기대되고 신뢰가 되었다. 그런 마음이 생긴 것에 감사하고 기도를 간단히 마쳤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나보다. 신뢰한다고 하지만 또 이번 믿음의 모험이 나에게는 두려움이 수반되는 것이었는지 찬양을 틀면서 부터 울컥 눈물이 솟았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아버지 앞에 머물렀다. 작고 흔들리는 믿음이지만 믿음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믿음의 친구들을 곁에 주셔서 감사했다. A랑은 1년 남짓 만났다. A와 만나면서 하나님이 A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A가 자유케 되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게 하셔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목격하게 해준 하나님과 A에게 고마웠다. 그런데 A는 자기를 참아주고 기다려준 하나님과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웠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A를 통해 나를 위로하신다. 영적지도는 나이와 거리를 넘어 soul mate를 만들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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